그것을 직접민주주의라 이야기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진지하게 혹은 격렬하게 토론하고 의사를 정리한 후에 다수의 의견이 모아지는대로 움직입니다.
예컨대 어제 집회에 참석했던 어떤 분은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티로폼 연단을 쌓으면서 있었던 격렬한 논쟁은 그럴수 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었습니다.
시민들의 생각과 의견이 서로 달랐습니다. 이건 빨간쪽끼를 입은사람들의 정체가 뭐냐(선동가능성의 우려때문에) 혹은 프락치가 개입된것이 아니냐 하는 이런 여타 문제의 소지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스티로폴 상자를 쌓아서 계단을 만들어 이메가식 소통의 상징인 컨테이너를 한번 밟아보자라고 하는 의견이 대다수였습니다. 사실입니다. 인터넷 생중계로 보신 분들의 대부분이 선동시민 또는 프락찌라고 우려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죠. 저조차도 잠시동안 혼란이 생길정도였으니까요.
현장에 직접 가보았다면 알겠지만,,, 그 누구도 컨테이너 박스를 넘어서갈거라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 무시못할 높이와 그리고 그 뒤로 수많은 전경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때 그건 미치지 않고서야 혹은 프락치가 아니고서야 컨테이너박스를 넘어가는 행위는 엄두도 못낼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카페에서도 또 다음 아고라에서도 시위가 계속 진행되면서 비폭력/폭력 문제로 또는 전경버스를 끌어내어 청와대행을 하느냐 마느냐에 따른 상반된 의견이 서로 팽팽하지 않았습니까?
인터넷상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던 이런 일련의 논쟁이 시위현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난거라 봅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이 생각을 조금만 더 차분하고 신중하게 하셔야 합니다. 이건 절대 분열하는것이 아닙니다. 합의점을 찾기위한 과정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최종목표점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하는 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을 밤새도록 지켜보면서 저도 고함을 지르고 구호를 외치면서 속상해 하고 또다시 고함을 지르는 과정을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우왕좌왕과 갈팡질팡 하는 와중에도 우리 시민들은 점점 합의점을 찾아가고 질서가 잡히는 모습을 보였고 그 결과는 정말 아름다움 그 자체였습니다.
태극기와 깃발들이 하나둘씩 컨테이너박스위로 올라가고 현수막이 펼쳐지면서 시민들은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보내며 어느새 제 귓가에는 애국가가 울려퍼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의견이 갈렸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고 공통의 해답을 찾았다는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바로 그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이 바로 직접민주주의라고 봅니다. 서로의 이해관계와 감성과 생각과 정보를 공유한 후, 집단적으로 판단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과정들이 훨씬 더 규모가 큰 '정치적 의사결정'의 과정에 적용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 첫 발자국을 뗀 것입니다. 2천년전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고 역사상 단절되었던 "진짜 민주주의"를 향해서 말입니다. 지금 제기되고 있는 '국민소환제'는 바로 직접민주주의의 첫걸음입니다.
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국민대책위에서 20일을 시한으로 이후 정권퇴진운동을 벌여가겠다고 하였는데요.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단순히 우리의 뜻은 이렇습니다 표현하는 것으로 만족하기 위해 촛불을 든게 아니라면요. 국민이 분노하는 것은 이렇게 한달넘게 지속된 촛불을 통해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해졌음에도 피해갈 구멍만 찾으며 거짓말로 때우려는 이명박정부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명박이 끝까지 자기 고집을 피울경우 이..
1. 거리의 정치는 이미 대의제를 넘어섰다. 예전의 관성으로 거리에서 '대중'들을 '지도'하려 했던 시민단체들, 운동단체들은 이 놀라운 상황에 어찌할바를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이 움직이는 방식도 일종의 대의제였기 때문이다. 대신 싸우고 사람들을 지도하고 이끌고, 경찰과 타협하고 사람들의 동선을 조율하는 것. 사람들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단체들, 운동단체들이 조율하는 것이 바로 대의제였고, 이것이 그 동안 우리 운동이 진행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거리의 정치는 이미 그것을 뛰어넘었다. 지도부가 없다. 누군가 마이크를 들고 '지도'하려고 하면 기어코 마이크를 꺼버린다. 그 누구도 이 공간에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동등함. 그 동등함으로 그 공간에 같이 존재하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질서가 없는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시위는 본 적이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하면 되고 무엇을 하면 안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경찰의 무수한 폭력에도 폭력으로 맞대응하는 것이 결코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철저하게 자신들의 행동을 조율하고 있다. 누군가 사고를 칠 것 같으면 바로 격리시켜 버린다.
거리행진의 방향도 결정된 것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향을 잃지도 않는다. 약간의 혼란이 있지만 곧 합의를 하고 움직인다. 결정은 바로 그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이미 거리에서는 직접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웬만한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는 이 거대한 변화를 은퇴한 노정객이 알아챘다.
2. 촛불문화제 전으로 돌아가 보자. 이 많은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광장에 모이게 되었을까? 그것은 순수하게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 광우병 쇠고기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울분, 그리고 광우병의 증거를 찾기 위해 정보를 확인하고 확인된 정보를 확산시키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렸던 수백만개의 손가락들... 그것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마침내 수만개의 촛불로 변화되었다. 그 시작에는 어떤 지도부도 없었다. 어떤 지령도 없었다. 지침도 전략도 없었다.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움직이며 정보를 모으고 공유하고, 잘못된 정보를 확인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고 최종적으로 거리에 선 것이다.
이 과정 속에는 어떤 대의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가 자기 스스로를 대표할 뿐! 나는 내가 본 것과 들은 것과 생각한 것과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속에서 나 스스로를 대표하기 위해서 광장에 선 것이지, 다른 어떤 누군가를 대표하기 위해서 혹은 다른 어떤 대표자를 뽑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다.
바로 그렇기에 사람들은 기존 시민단체들의 익숙한 행동들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 공간을 너무도 크게 장악해버리는 깃발을 내리게 만들고, 커다른 피켓을 작은 피켓으로 대체시키고, 획일적인 문구를 다양한 주장으로 그리고 급기야 관성적으로 공간을 장악하려는 시민단체들의 마이크를 꺼버렸다. 나를 대신할 누군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위대를 이끄는 건 경험많은 시민단체 회원, 운동단체 회원이 아니다. 바로 시민들 그 자신들이다.
직접민주주의! 이것이 바로 거리에서 작동하고 있는 직접민주주의이다.
3. 단지 거리뿐일까? 간접민주주의의 이론적 근거는 국가 단위의 영토와 국민수 정도가 되는 공간에서 1) (인터넷 이전의 사회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동등한 정보를 비슷한 순간에 공유할 수 없다는 것 2) 비슷한 정보를 공유하더라도 그 정보를 기반으로 한 다수의 판단이 빠르게 집적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다수의 의견을 모두 취합하기에는 의사결정이 너무 늦어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다수의 의견을 모두 취합하는 (직접민주주의적인) 방식을 채택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국민 주권>이라는 민주주의의 원래 이념에 비추어 간접민주주의는 사실상 주권을 위임하는 것이기에 민주주의의 원래 의미에서 벗어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간접민주주의가 작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리고 역사상 있었던 그 무수한 직접민주주의 실험들이 실패했던 것은 이런 현실적인 장벽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런 현상은 모두 역전되어 버렸다. 인터넷을 통한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은 근대국가라는 커다란 공간적인 거리를 더 이상 의미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공간을 뛰어넘는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로써 '다수의 사람들이 동등한 정보를 비슷한 순간에 공유할 수 없었던' 간접민주주의 첫번째 조건이 해체된다.
수십만, 수백만명의 의견이, 현실에서 필요한 실행의 속도를 방해하지 않고 수렴될 수 있을까? 당연하다. 이미 지난번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 모바일 투표로 이에 대한 실험이 진행된 바 있다. 투표? 그것은 단지 형식적인 행위일 뿐이다. 사실 인터넷 게시판에 쏟아지는 댓글은 빠르면 하루 만에 민심을 파악하게 만든다. 이런 빠른 커뮤니케이션 덕분에 숭례문 화재 사건 때 이명박의 '성금 재건' 발언은 하루만에 취소되고 말았다.
사실은, 이미 우리 사회 내부 구성원들의 의사소통 속도는 직접민주주의 단계에 와 있다. 늦어지는 것은 오히려 정치권이다. 사회 내부에서 형성되는 의사소통과 판단의 집적이 간접민주주의에 기반한 지금의 정치권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정치권이 사회 전체 의사소통의 속도를 막고 있는 형국이다. 즉 우리는 인터넷에 기반한 직접민주주의적인 미디어 환경에서 간접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직접민주주의는 우리가 만들어야 할 지향점이나 이상향이 아니라, 환경, 인터넷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커뮤니케이션 환경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 전체의 자원 분배 역할을 하는 정치적 의사결정이 민의가 형성되는 속도에 맞추기 위해서는 직접민주주의를 도입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안된다면, 우리는 계속 의사결정이 지체되는 현상을 겪게 될 것이고 이것은 곧 사회 전체의 지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쇠고기를 통해 겪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사회 전체 의사결정의 지체! 이미 민의가 무엇인지는 분명해졌는데도 그것을 반영할 방법이 없으니 한달째 이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터넷 시대의 커뮤니케이션 환경에 맞도록 정치제도를 바꾸는 것은 대단히 시급한 과제이다. 즉 우리는 이제 직접민주주의를 이 땅에 구현해야하는 환경을 맞고 있다.
4. 무엇을 할 것인가?
직접민주주의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직접민주주의에 회의적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고, 직접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 기득권 층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이며, 국가의 중요한 사안들을 보통 사람들의 평균적인 판단으로 결정하는 메커니즘에 대해 엘리트 지식인들의 회의적인 시선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국민 탄핵제'라는 권한만 있었어도 이 사태는 아주 쉽게 해결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달이 넘는 기간 동안 수만명이 거리에서 뛰어다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직접민주주의를 정면으로 제기해야 한다. 만약 앞으로 개헌이 있다면, 우리는 직접민주주의의 가장 기초 항목인 국민 소환제, 국민 탄핵제, 국민 발의제를 관철시켜야 한다.
우리의 지향점은 분명하다. 21세기, 세계 정치사의 새로운 혁명, 직접민주주의가 우리의 눈 앞에 와 있다. 직접민주주의는 2천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지고, 이제 이 땅에서 두번째 만들어지는 것이다. 기원 이후 처음 있는 역사적 사건이 바로 우리 앞에서 일어나고 있다. 2천년 전 그리스의 메타포를 채용한 다음의 아고라는 단지 어느 한 인터넷 업체의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2천년 전의 전무후무한 역사적 경험을 다시 불러오고 있다는 상징적인 공간이며, 개인들의 직접행동을 이끌어낸 직접민주주의의 예비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의 우리 모습을 자랑스러워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바로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직접민주주의가 십년 후에 세계의 정치체제를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탄핵'이란 소리가 넘쳐흐른다. 다음 아고라에서 시발된 탄핵의 목 소리는 꺼질 줄 모른다. 이명박 본인이 만든 청계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은 현재의 민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 촛불은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 않다.
사기업인 인터넷 포털 다음에서 진행되는 법적인 구속력이 없는 포털 서비스 에서의 서명운동이지만, 이미 그 서명을 통해 표현된 의지만 120만명을 훌쩍 넘겼다. 갈길이 태산이다. 의료보험 민영화, 공기업 민영화, 대운하, 자사고 설립 등등... 무엇 하나 걸림돌이 아닌 것이 없다. 이명박 정부는 특유의 추 진력으로 100m 달리기를 하러 나왔는데, 알고 보니 장애물 경기장에 들어선 것이다. 과연 이 경기의 끝은 어떻게 될 것인가? 누구도 그 끝을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미 우리에게 '탄핵'이란 단어는 낯선 단어가 아니다. 2004년 우리는 이미 대통령 탄핵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 다. 무엇보다, 그때는 국민의 '대리인'인 국회의원들이 탄핵을 시도했었고, 대리인들의 탄핵 시도는 바로 '주권재민'의 주체인 국민들에 의해 저지되었 다. 그런데 지금은 '주권'을 가지고 있는 국민들이 탄핵을 주장하고 있다. 탄핵의 주체가 달라진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커다란 간극을 발견한다. 바로 '주권을 가진 국민들'과 '국민들의 정치적 대리인들' 사이의 간극 말이다. 이 간극은 이미 2004년의 탄핵에서 한번 확인된 바 있다. 그리고 2008년 우리는 이 간극, 바로 민심과 정치집단 사이의 괴리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원론에서는 '주권을 가진 국민들'과 '국민들의 정치적 대 리인들'이 서로 밀접하여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상정되어 있다. 적어도 원론 적으로는 마치 그 둘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서로를 끌어주는 것 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대의제 민주주의 이론이 어떻든, 현재 시점에 그 둘 사이는 서로 들떠 있다.
국민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된 바로 그 대통령을 배출한 한나라당이 민심 으로부터 이반되어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야당은? 민주당으로 대변되는 야당 역시 국민들의 민심으로부터 붕 떠있기는 마찬가 지다. 그들은 민심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민심 뒤에 숨어 눈치를 보고 있 다. 탄핵의 대상이 된 여당과 민심을 읽지 못하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야당 만이 존재하는 지금, 지금의 상황만을 놓고 본다면 아마도 사람들이 직접 나 선 것은 자신을 대변해줄 변변한 야당도 없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 이다. 즉 제대로된 야당이 있었다면 '민심'을 대변해 줄 수 있었으리라는 가 정, 그래서 대의제 민주주의가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했으리라는 가정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가 꼭 짚어보아야할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없을까? '국민들의 대리인'이 모인 정치권에서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던 탄핵이 국민들의 입에서 자발적으로 나오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 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것은 첫번째, 지금 현재 한국에서 국민의 민의를 대변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두번째 더 중요한 것은 이제 국민들 스스로 탄핵을 제기할 수 있을 정도로 직접적인 참 여가 가능한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사실 첫번째 문제는 대의제가 거 의 언제나 잘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두번째, 불과 일주일만에 국민들의 직접적인 참여가 가능해지는 환경은, 우 리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다.
지금의 상황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자. 야당이 아주 소극적으로 쇠고기 협상 을 비판하고 있을 즈음, 최초의 촛불문화제였던 5월 2일 청계광장의 집회 소 식이 인터넷을 통해 퍼지기 시작한 건 정말 일주일도 채 안되는 일이었다. 그 일주일 사이에 사람들은 스스로 정보를 공유하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공감대를 만들고 급기야 수만명의 인파를 청계광장의 촛불로 연결시켰다. 그 런데 이렇게 사람들이 순식간에 참여하는 환경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사 실 촛불의 시발점이었던 '미선이 효순이' 추모 집회는 집회가 제안된지 불과 3-4일만에 조직되었다. 숭례문 화재 때 '국민 성금으로 숭례문을 재건하겠다 '는 발언은 인터넷에 쏟아지는 여론의 폭탄을 맞았고, 바로 그 다음날 철회 되었다. 불과 하루만에 말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이슈가 공론화되는 것은 하루면 충분하고, 큰 사안인 경우 에도 다수의 사람들이 정보를 습득하고 공유하고 토론하고 입장을 정리하고 행동에 나서기까지 이 모든 과정들이 일주일이면 가능한 시점에 다다른 것이 다. 즉 국민들의 집합적인 의사형성 및 표현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으며, 이는 곧 대의제 정치인들이 이를 수렴하여 정책에 반영하는 시간과의 차이가 점점 더 격차가 벌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바로 속도! 즉 국민들이 공론을 형성하고 의사를 표현하는 시간이 불과 일주일 안팎으로 당겨지는 지금의 커뮤니케이션 속도를 '직접민주주의 가 가능해지는 환경'이라고 본다. 기존의 정치권은 민심 위에 들떠있고, 국 민들은 직접적인 참여를 할 수 있는 환경! 이런 환경 속에서 대의제 민주주 의는 이제 더 이상 인터넷으로 형성되는 민심의 속도를 좇아갈 수 없다. 정치권이 국민들의 요구를 따라갈 수 없고, 국민들은 직접 참여할 수 있는데 굳이 대의제 민주주의에 머무를 필요가 있을까?
역사적으로 대의제 민주주의가 광범위한 동의를 얻은 것은, 근대국가 정도의 넓은 공간과 최소 수백만에서 수억에 이르는 인구수를 가진 공동체에서 개인 들끼리의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공동체 안의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 빠르게 의견을 수렴하고 의사결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즉 대의제 민주주의의 존재 의미는 대의제가 근대 국가 내부에서 커뮤니케이션 속도의 시공간적 제약을 보완할 수 있는 유력한 장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넷 시대에 국민들이 직접 사회적인 의제를 설정 하고 공론을 형성하고 직접 행동을 하는 상황에 이르러, 개인들이 인터넷으로 휴대폰으로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는 상황에 이르러, 우리에게 대의 제 민주주의가 적합한지에 대해서 우리는 심각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대의제로 민의를 반영하는 속도와 국민들이 스스로 공론을 형성하고 행동에 나서는 속도의 차이는 점점 격차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터넷이 도입되면서 직접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자주 거론되었던 이야기이다. 아니 이미 1960년대에 맥루한은 전기시대에 이르러 대의제 민주주의가 직접민주주의로 바뀔 것이라 고 예언한 바 있다.
정보의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정치는 대표를 선출하여 결정권을 위탁하는 경향에서 벗어났다. 전 사회 공동체가 의사 결정이라는 중추적 행위에 직접적 으로 관여하게 된 것이다. 정보의 속도가 느려지면 대리자나 대표자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대리자들을 내세움으로써, 사회의 다른 사람들이 처리되고 고려되기를 바라는 공공의 관심사에 대한 여러 분야의 견해들을 내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기의 속도가 이러한 대리, 대표 조직에 도립될 때, 이미 구식이 되어버린 이러한 조직은 속임수와 임시변통이라는 방법으로 간신히 그 기능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맥루한이 예언했던 바로 그 현상이 지금 21세기 한국에서 시작되고 있다. 나는 이미 다음 아고라에서 비공식적이고 비제도적이지만 실질적인 의미의 직접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고 판단한다. 네티즌들에 의해 직접민주주의의 ' 돛'이 올려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실제 법적인 효력이 있는 서명이라면, 그 끝은 정말 '탄핵'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비공식적인 서명이며, 따 라서 그것이 전체 국민 2/3의 서명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법적인 구속력을 가지지는 않는다. 지금의 한계는 바로 이것이다 : 민심은 드러나지 만 그것을 반영할 수 있는 제도적인 통로가 존재하지 않는 것. 지금 우리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어디에도 이런 국민들의 직접적인 요구를 수렴할 사회적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제도화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이미 우리는 수차례의 경험 을 통해 국민들 스스로 의제를 설정하고 담론을 형성하고 행동을 조직하는 사례를 보아왔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직접민주주의를 제도화하여 개인들의 집합적인 의사가 실시간으로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직접민주주의가 우리들의 정치체제로 자리잡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의 역사적 원형인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체제 는 그것이 완성되기까지 3-4백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우리가 인터넷이란 훌륭한 툴을 가지고 있더라도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 제도 정도를 완성 하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단지 우리 사회에 직접민주주 의가 필요하고 지금 시점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공론화하는 데에만도 최 소 몇 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지 않을까? 또한 어떤 형태의 직접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적합한지를 모색하는데에도 상당히 오랜 시간과 실험과 시행착오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 작업을 큰 국가단위에서 시작할 필요는 없다. 가장 먼저 '직접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정당' 같은 곳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사안을 당원들 에게 직접물어 당의 진로를 결정하는 선도적인 실험을 할 수도 있다. 또한 시나 군 단위의 지방자치체에서 작은 규모로 직접민주주의를 시범적으로 시행해볼 수도 있다. 그렇게 작은 영역부터 직접민주주의를 도입하고 그 것을 제도화함으로써 우리는 사회 전반을 직접민주주의 형태로 바꾸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도가 아주 낯선 것만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직접민주주의와 유사한 형태의 참여행위들을 경험한 바가 있다. 2002년 유시민씨를 주축으로 만들어 진 개혁당은 인터넷에 기반한 당원들의 직접 투표로 정당의 주요 정책을 결 정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 실험은 당원들의 직접적인 의사결정 구조가 완벽하게 보장되지 않았다는 점과, 개혁당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해 체되고 말았다는 점 등에서 여러가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큰 의미를 지닌 실험이었다. 이것은 비록 정당수준에서 일회적으로 행해진 것이긴 하지만, 인터넷에 기반한 직접민주주의적인 의사결정체계가 정당으로서 정책을 제시하고 의견을 수렴하고 그것을 집행하는데 필요한 의 사결정 속도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국민들의 직접적인 의사를 수렴하는 새로운 기술적인 방안 도 경험했다. 2007년 통합민주당 대선 경선 때 한명숙 전 총리가 처음 제안 한 모바일 투표는 방법상 다소 어려워보이는 '실시간 여론 수렴'에 대해서 꽤 신뢰성 있는 대안을 실험한 역사상 최초의 사례이다. 그리고 그 이후 민 주노동당과 창조한국당도 모바일 투표를 시행한 바 있어, 향후 실시간으로 민심을 수렴하는 하나의 기술적 장치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해 주 었다.
이것만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정보 생산과 유통을 원활하게 해주고 보다 더 나은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게 해주고 개인들의 자기표현을 촉진하는 Web2.0 관련 기술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제공해줄 것이다. 더구나 24시간 항시 네트워크에 접속이 가능한 무선인터넷 환경은 더욱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만들어 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직접민주주의가 이미 우리 옆에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터넷 시대에 대의제 민주주의는 몸에 맞지 않 는 작은 옷이다. 그것은 우리의 활동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제 우리에게 필 요한 새로운 옷, 직접민주주의를 만들어가야할 시간이다.
※ 명박하다 ☞ [형용사] 운명이나 팔자가 기구하고 복이 없다.
대중은 무엇에 분노하는가?
온 국민을 희생시킨 이명박 '등신외교'
글: 진중권 / 중앙대 겸임교수
이명박 탄핵 서명이 어느덧 110만 명을 넘어섰다. 그러자 정권에서 부담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런데 아직 정신은 못 차린 것 같다. 이 상황에 대한 이명박 정권의 입장
아직까지 이런 규모로 아이들이 사회에 진출한 적은 없었기에 이것은 일찍이 우리 사회에서 드문 일이고 적잖이 놀라운 일임에 분명하다.
현장에 가보면 알겠지만 촛불문화제 참석자의 절반 이상이 중고생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선동과 유언비어에 움직인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이 단상에서 발언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그들의 논리는 아주 분명하다.
사실 오히려 집회를 이끌고 있는 건 중고등학생들이다. 어른들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선동당하고 있다. (나를 포함해 나이 좀 있는 사람들 이 대목에서 부끄러워 해야한다.)
그들은 교육자율화, 대학등록금, 영어몰입교육, 우열반 편성 등 자신들이 처한 교육 환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미국산 소고기와 광우병의 상관관계를 잘 알고 있으며 대운하와 수도 민영화와 의료보험법 개정이 무슨 의미인지 그들은 정말로 똑똑하게 이명박 정부가 그 동안 무슨 일을 해왔는지를 잘 알고 있다.
촛불문화제에서 아이들이 하는 얘기를 한번 들어보라. 그들은 자신들이 배운 민주주의의 기초 즉 다수 국민의 뜻을 따르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며 왜 자신들이 배운 것과 정치권이 하는 것이 틀리냐고 지적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배웠습니다. 저도 국민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집회를 불법으로 규정하십니까? 나도 국민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도대체 아이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사회에 관심이 많아졌을까?
나는 크게 3가지 이유를 뽑는다.
첫번째 : 세대론 이들은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 가정에서의 억압, 교육현장에서의 억압, 사회 구조적인 억압에서 가장 덜 노출된 세대이다. 사실상 이전 세대가 피흘려가면 만들어낸 민주화의 혜택 속에서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가장 덜 권위적으로 자란 세대들이다. (물론 아직도 많은 학교는 아직 권위적이긴 하지만...) 또한 월드컵 축제를 초등학교 때 경험한 월드컵 세대들이기도 하다.
어떤 분은 이 세대가 '자기 몸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첫번째 세대라고 한다. 즉 자기 몸과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개인적인 욕망을 가진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단상에 올라온 아이들은
'나 죽기 싫어요' '나는 커서 훈남 만나서 천년 만년 잘 살고 싶어요' '우리도 나중에 클럽도 가고 부킹도 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도 누려보기 전에 왜 우리를 병들게 하려고 합니까?'
라는 발언들을 자유롭게 말한다. 물론 이런 발언들은 거기 모인 또 다른 학생들의 열렬한 호응을 일으킨다.
두번째 : 네트워킹 요즘 아이들이 숙제를 하는 방법이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네이버 지식검색과 네이트온을 켜놓고 숙제를 한단다.
예전의 정보는 외우는 것이 주된 것이었다면 이제 정보는 찾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찾은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들은 지식을 습득하는데 있어 네트워크를 가장 기본적인 활동으로 삼고 있다. 이것이 이전 세대들이 학습하던 습관과 달라지는 점이다.
기존에 공부는 달달 외우는 것이었다. 심지어 수학도 외워서 푸는 방식으로 배운다. 그런데 이들은 외우는 것 이외에 정보를 찾고 조합하는 일들을 한다. 외우는 지식에서 찾는 지식, 찾은 지식을 공유하고 재조합하는 것...
사실 이미 정보가 엄청나게 쌓여있는 마당에 네트워크에 접속만 하면 정보를 알 수 있는 마당에 외우는 능력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인터넷 시대에 필요한 능력은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찾고 조합하고 필요할 때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들은 검색과 메신저를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이런 습관을 가지게 된 세대들이다.
정보를 찾는 것뿐만 아니라 공유하는 일에서도 이들은 탁월하다. 이들은 어떤 소식을 들으면 문자로 쪽지로 순식간에 공유한다. 게시판에 펌질을 하고, 친구들과 지인들과 공유한다. 정보의 공유에 있어서는 이전의 어떤 세대들보다 빠르다. 그리고 그렇게 공유된 정보는, 필요한 경우 공동의 행동으로 연결된다.
"너도 나가니? 나도 간다..."
사회 행동을 하는데 있어 혼자는 아무래도 두렵다. 이들은 네트워킹을 통해 자신들이 혼자가 아님을 안다. 친구들과 친구의 친구들과 그 친구의 친구의 친구들이 함께 행동할 것을 순식간에 공유하고 나면, 혼자 행동해야한다는 두려움 따위는 생길 이유가 없다.
아이들은 개인적이고 고립되어 있는 것 같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고도로 네트워크화되어 있다. 그리고 이 네트워크가 아이들을 공동행동으로 이끈다.
세번째 : 정보량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습득하는 정보량이 성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10년전만 하더라도 신문을 읽거나 뉴스를 접하는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신문을 보는 가정도 많지 않았고, 학생이 뉴스를 보고 있을 시간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학교라는 제도가 아이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켰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커리큘럼 이외의 정보를 습득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 조금 다른 환경을 가진 아주 소수의 아이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 아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온갖 소식을 접할 수 있다. 자신들과 관계 있는 신문기사, 뉴스는 즉시 반 아이들과 공유해서 읽을 수도 있다. 즉 적어도 이들은 이전 세대의 중고등학생들과 같이 학교 외부의 정보, 사회에 대한 정보로부터 차단되지 않은 아이들이다.
비슷한 정보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성인과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 오히려, 신문이나 뉴스를 거의 보지 않는 다수의 어른들과 조중동에서만 정보를 얻는 어른들과 비교하면 이들의 정보 습득량이 훨씬 많다.
이러한 특성은 원시사회를 돌이켜보면 훨씬 잘 이해된다. 원시사회에서는 지금의 중고등학생들과 비슷한 나이인 15-16세에 성인식을 했는데 성인식을 한 후에는 어른과 똑같은 대접을 해 주었다. 심지어는 12-13세에 성인식을 하는 부족도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조선시대까지 한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15-16세가 되면 결혼을 할 수 있었고, 결혼을 하고 나면 어른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즉 그 정도 나이면 부족 안에서 어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 공동체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경제활동에 참여하거나 결혼과 아이로 부족 구성원을 재생산하거나 하는 어른들의 활동 말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은 삶과 학습이 분리되어 않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 가족과 공동체 구성원들이 거의 매일 접촉을 하며 살았는데, 이런 사회구조는 그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거의 모든 일들을 전체 구성원이 공유하게 만든다. 학교라는 공간이 없이 공동체 내부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15-16년 동안 어른들이 하는 일을 그대로 보고 따라서 배운다. 일상이 배움이고 놀이이고 어른들 따라하기이고, 공동체의 어떤 의례, 규칙, 삶의 방식을 배우는 공간이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10여년을 배우지 않으면서 배운다.
즉 그 부족의 생존에 필요한 각종 정보들을 일상에서 매일 습득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자신들의 사회에 대해서 어른들과 비슷한 정보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어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근대사회에 들어와서는 이것이 확연하게 달라지는데 그것은 근대사회는 아이들을 학교라는 공간에서 사회와 고립시켜 길러왔기 때문이다. 즉 아이들은 교과서에 나오는 커리큘럼만 배울 뿐 그 이외 사회에 대한 정보는 접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인터넷에 들어오면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원하기만 하면 어른들과 동등한 수준의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특히 기존에 알려진 정보가 많지 않은 광우병과 경우, 매일 새로운 정보가 쏟아지는 사안에 대해서는 어른과 아이들의 정보량 차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라고 한다면 삶의 경험으로서만 축적될 수 있는 종류의 지식, 지혜 혹은 지나온 세월 동안의 역사적인 흐름에 대한 인식, 사회생활에서의 좋은 혹은 좋지 않은 경험... 이런 정도가 차이가 날까?
즉 인터넷이 사회의 중추적인 커뮤니케이션 매개체 역할을 하는 지금의 사회에서 사회의 어떤 영역들은 원시사회에서 아이들이 그 공동체의 모든 정보를 어른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접하는 바로 그런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들을 어른보다 못한 ‘아이’라고 보는 순간 우리는 심각한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들의 사회적인 진출은 이미 몇가지 사건으로 예견되어 있었다. 이들이 스스로 문제제기하고 조직해서 만들어낸 두발 자유화 시위가 그 한 사례이다.
또한 자신들이 좋아하는 '오빠'들이 기획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 직접 연계기획사를 차려 오빠들을 빼내오겠다고 했다가 급기가 그 회사의 주식을 사서 아예 회사를 인수하려고 시도를 했던 사건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한 사례이다.
특히 두 번째 방법은 예전의 아이들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었던 방법이다. 아니, 오히려 어른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그들은 어른들의 상상력이 미치지 못하는 방법으로 세상에 진출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을 ‘아이들’가 아닌 다른 시각으로, 동등한 개체로 보아야 한다. 중고등학생들을 예전과 같은 아이로 보는 순간 아이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태까지 군인 신분이라는 제약으로
하고픈 말이 있어도 본의 아니게 참았었습니다.
뭐... 군인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지요.
그래서 본의는 아니었지만 어리석게도 저는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nbsp;
이제서야 민간인의 신분이 된 이 때,
광우병 파동으로 정의롭게 분노하고 있는
우리 후배들, 10대들에게 이제는 대학생으로서
정말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nbsp;
어르신들은 말씀하십니다.
그런 거 할 시간에 공부나 더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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