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직접민주주의'를 언급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촛불문화제와 관련 12일 "이 새롭고 엄청난 경험이 평화적으로 행해져 성공을 거두면 21세기 세계의 민주주의에 큰 감동과 영감을 주고 새로운 진로를 제시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8주년 기념 특별강연과 만찬'에서 "2000년전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된 직접 민주주의 이래 처음으로 수천만 국민의 참여와 관심 속에 한국에서 다시 그 직접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직접민주주의는 인터넷과 문자메시지를 통한 온라인과 거리에 모인 촛불문화제의 오프라인의 연대 속에 행해지고 있다"며 "우리는 수많은 희생을 바치면서 피를 흘려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이제 한국에서 독재가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DJ "촛불문화제 성공하면 세계 민주주의에 큰 감동")
이 말은 처음이 아니다. 이미 지난 6월 4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촛불문화제는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된 중대한 변화고 말한 바 있다.
같은 말을 두번 반복했다는 건, 그 말에 대한 확신이 있다는 이야기이고
이 시대에 전달해야 할 메시지라는 판단이 있다는 뜻이다.
이 블로그에서 누차 이야기하지만
지금의 촛불문화제는 한국사회가 직접민주주의로 이행하기 시작한
바로 그 첫 출발점을 보여주고 있다.
네트워크로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개인들, 즉 네트워크화된 개인들이
한국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대규모로, 집단적으로 생겨나고 있으며
그들이 이제 사회의 핵심 권력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직접민주주의'라고 말한 것은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 한국사회의 정치적 지형이 어디에 있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정확히 꿰뚫어 이야기한 것이다.
최첨단 IT 문화가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한국에서
20세기의 대의제 정치모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정치모델이 탄생하고 있는 그 현장을
이 노회한 정치인이 꿰뚫어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치권에서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은 저 발언은 앞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지향점을 제시하는
나침판으로 1면에서 언급되었어야 할 내용임에도, 단지 지나가는 기사로 처리되고 있다.
적어도 기존의 지도층에서 지금의 상황을 꿰뚫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직접민주주의란 어짜피 몇몇 정치인이 아닌
바로 수천만명의 개인들이 만들어가는 것!
그것은 소수의 사회 지도층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이전 사회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그러니 과거의 '지도층'들이 이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분명한 것은 직접민주주의는 이미 비가역적인 형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과제는 직접민주주의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어떻게 가속화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다.
'직접민주주의'에 해당되는 글 6건
- 2008/06/13 블로초 촛불문화제는 고대 아테네 직접민주주의의 부활
- 2008/06/11 블로초 국민소환제, 직접민주주의의 시작입니다.
- 2008/06/05 블로초 이제는 직접민주주의다!
- 2008/05/11 블로초 네티즌, 직접민주주의의 돛을 올리다!
- 2007/09/17 블로초 휴대전화를 활용한 경선투표에 참여하다 (2)
- 2005/05/17 블로초 정보와 시간, 그리고 직접민주주의
| “끝까지 국민 무시한다면…” 소환제 도입 목소리 |
그 외에도 슬슬 직접민주주의를 언급하는 기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의민주주의 한계에 근본적 물음 던졌다”
[세상읽기] 국가적 위기의 원인과 대안 / 박명림
“임시직이 생겼어요, 시민이라는”
이미 이야기했지만 광장에서는 이미 직접민주주의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직접민주주의라 이야기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진지하게 혹은 격렬하게 토론하고 의사를 정리한 후에
다수의 의견이 모아지는대로 움직입니다.
예컨대 어제 집회에 참석했던 어떤 분은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티로폼 연단을 쌓으면서 있었던 격렬한 논쟁은 그럴수 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었습니다.
시민들의 생각과 의견이 서로 달랐습니다. 이건 빨간쪽끼를 입은사람들의 정체가 뭐냐(선동가능성의 우려때문에) 혹은 프락치가 개입된것이 아니냐 하는 이런 여타 문제의 소지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스티로폴 상자를 쌓아서 계단을 만들어 이메가식 소통의 상징인 컨테이너를 한번 밟아보자라고 하는 의견이 대다수였습니다. 사실입니다. 인터넷 생중계로 보신 분들의 대부분이 선동시민 또는 프락찌라고 우려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죠. 저조차도 잠시동안 혼란이 생길정도였으니까요.
현장에 직접 가보았다면 알겠지만,,, 그 누구도 컨테이너 박스를 넘어서갈거라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 무시못할 높이와 그리고 그 뒤로 수많은 전경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때 그건 미치지 않고서야 혹은 프락치가 아니고서야 컨테이너박스를 넘어가는 행위는 엄두도 못낼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카페에서도 또 다음 아고라에서도 시위가 계속 진행되면서 비폭력/폭력 문제로 또는 전경버스를 끌어내어 청와대행을 하느냐 마느냐에 따른 상반된 의견이 서로 팽팽하지 않았습니까?
인터넷상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던 이런 일련의 논쟁이 시위현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난거라 봅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이 생각을 조금만 더 차분하고 신중하게 하셔야 합니다. 이건 절대 분열하는것이 아닙니다. 합의점을 찾기위한 과정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최종목표점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하는 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을 밤새도록 지켜보면서 저도 고함을 지르고 구호를 외치면서 속상해 하고 또다시 고함을 지르는 과정을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우왕좌왕과 갈팡질팡 하는 와중에도 우리 시민들은 점점 합의점을 찾아가고 질서가 잡히는 모습을 보였고 그 결과는 정말 아름다움 그 자체였습니다.
태극기와 깃발들이 하나둘씩 컨테이너박스위로 올라가고 현수막이 펼쳐지면서 시민들은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보내며 어느새 제 귓가에는 애국가가 울려퍼졌습니다.
그 현장에 서 있던 모든분들은 아마 느끼셨을꺼라 생각합니다. 정말 감동에 감동에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원문 : http://cafe.daum.net/antimb/KDf2/1279)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의견이 갈렸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고 공통의 해답을 찾았다는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바로 그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이 바로 직접민주주의라고 봅니다. 서로의 이해관계와 감성과 생각과 정보를 공유한 후, 집단적으로 판단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과정들이 훨씬 더 규모가 큰 '정치적 의사결정'의 과정에 적용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 첫 발자국을 뗀 것입니다. 2천년전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고 역사상 단절되었던 "진짜 민주주의"를 향해서 말입니다. 지금 제기되고 있는 '국민소환제'는 바로 직접민주주의의 첫걸음입니다.
국민 소환제 서명하러 가기 : http://gobada.co.kr/2mb_sig/sig.php
이제는 직접민주주의다!
1. 거리의 정치는 이미 대의제를 넘어섰다. 예전의 관성으로 거리에서 '대중'들을 '지도'하려 했던 시민단체들, 운동단체들은 이 놀라운 상황에 어찌할바를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이 움직이는 방식도 일종의 대의제였기 때문이다. 대신 싸우고 사람들을 지도하고 이끌고, 경찰과 타협하고 사람들의 동선을 조율하는 것. 사람들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단체들, 운동단체들이 조율하는 것이 바로 대의제였고, 이것이 그 동안 우리 운동이 진행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거리의 정치는 이미 그것을 뛰어넘었다. 지도부가 없다. 누군가 마이크를 들고 '지도'하려고 하면 기어코 마이크를 꺼버린다. 그 누구도 이 공간에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동등함. 그 동등함으로 그 공간에 같이 존재하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질서가 없는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시위는 본 적이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하면 되고 무엇을 하면 안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경찰의 무수한 폭력에도 폭력으로 맞대응하는 것이 결코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철저하게 자신들의 행동을 조율하고 있다. 누군가 사고를 칠 것 같으면 바로 격리시켜 버린다.
거리행진의 방향도 결정된 것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향을 잃지도 않는다. 약간의 혼란이 있지만 곧 합의를 하고 움직인다. 결정은 바로 그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이미 거리에서는 직접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웬만한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는 이 거대한 변화를 은퇴한 노정객이 알아챘다.
""촛불집회, 직접민주주의 실현... 그리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2. 촛불문화제 전으로 돌아가 보자. 이 많은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광장에 모이게 되었을까? 그것은 순수하게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 광우병 쇠고기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울분, 그리고 광우병의 증거를 찾기 위해 정보를 확인하고 확인된 정보를 확산시키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렸던 수백만개의 손가락들... 그것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마침내 수만개의 촛불로 변화되었다. 그 시작에는 어떤 지도부도 없었다. 어떤 지령도 없었다. 지침도 전략도 없었다.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움직이며 정보를 모으고 공유하고, 잘못된 정보를 확인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고 최종적으로 거리에 선 것이다.
이 과정 속에는 어떤 대의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가 자기 스스로를 대표할 뿐! 나는 내가 본 것과 들은 것과 생각한 것과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속에서 나 스스로를 대표하기 위해서 광장에 선 것이지, 다른 어떤 누군가를 대표하기 위해서 혹은 다른 어떤 대표자를 뽑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다.
바로 그렇기에 사람들은 기존 시민단체들의 익숙한 행동들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 공간을 너무도 크게 장악해버리는 깃발을 내리게 만들고, 커다른 피켓을 작은 피켓으로 대체시키고, 획일적인 문구를 다양한 주장으로 그리고 급기야 관성적으로 공간을 장악하려는 시민단체들의 마이크를 꺼버렸다. 나를 대신할 누군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위대를 이끄는 건 경험많은 시민단체 회원, 운동단체 회원이 아니다. 바로 시민들 그 자신들이다.
직접민주주의!
이것이 바로 거리에서 작동하고 있는 직접민주주의이다.
3. 단지 거리뿐일까? 간접민주주의의 이론적 근거는 국가 단위의 영토와 국민수 정도가 되는 공간에서
1) (인터넷 이전의 사회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동등한 정보를 비슷한 순간에 공유할 수 없다는 것
2) 비슷한 정보를 공유하더라도 그 정보를 기반으로 한 다수의 판단이 빠르게 집적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다수의 의견을 모두 취합하기에는 의사결정이 너무 늦어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다수의 의견을 모두 취합하는 (직접민주주의적인) 방식을 채택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국민 주권>이라는 민주주의의 원래 이념에 비추어 간접민주주의는 사실상 주권을 위임하는 것이기에 민주주의의 원래 의미에서 벗어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간접민주주의가 작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리고 역사상 있었던 그 무수한 직접민주주의 실험들이 실패했던 것은 이런 현실적인 장벽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런 현상은 모두 역전되어 버렸다. 인터넷을 통한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은 근대국가라는 커다란 공간적인 거리를 더 이상 의미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공간을 뛰어넘는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로써 '다수의 사람들이 동등한 정보를 비슷한 순간에 공유할 수 없었던' 간접민주주의 첫번째 조건이 해체된다.
수십만, 수백만명의 의견이, 현실에서 필요한 실행의 속도를 방해하지 않고 수렴될 수 있을까? 당연하다. 이미 지난번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 모바일 투표로 이에 대한 실험이 진행된 바 있다. 투표? 그것은 단지 형식적인 행위일 뿐이다. 사실 인터넷 게시판에 쏟아지는 댓글은 빠르면 하루 만에 민심을 파악하게 만든다. 이런 빠른 커뮤니케이션 덕분에 숭례문 화재 사건 때 이명박의 '성금 재건' 발언은 하루만에 취소되고 말았다.
사실은, 이미 우리 사회 내부 구성원들의 의사소통 속도는 직접민주주의 단계에 와 있다. 늦어지는 것은 오히려 정치권이다. 사회 내부에서 형성되는 의사소통과 판단의 집적이 간접민주주의에 기반한 지금의 정치권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정치권이 사회 전체 의사소통의 속도를 막고 있는 형국이다. 즉 우리는 인터넷에 기반한 직접민주주의적인 미디어 환경에서 간접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직접민주주의는 우리가 만들어야 할 지향점이나 이상향이 아니라, 환경, 인터넷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커뮤니케이션 환경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 전체의 자원 분배 역할을 하는 정치적 의사결정이 민의가 형성되는 속도에 맞추기 위해서는 직접민주주의를 도입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안된다면, 우리는 계속 의사결정이 지체되는 현상을 겪게 될 것이고 이것은 곧 사회 전체의 지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쇠고기를 통해 겪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사회 전체 의사결정의 지체!
이미 민의가 무엇인지는 분명해졌는데도 그것을 반영할 방법이 없으니 한달째 이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터넷 시대의 커뮤니케이션 환경에 맞도록 정치제도를 바꾸는 것은 대단히 시급한 과제이다. 즉 우리는 이제 직접민주주의를 이 땅에 구현해야하는 환경을 맞고 있다.
4. 무엇을 할 것인가?
직접민주주의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직접민주주의에 회의적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고, 직접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 기득권 층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이며, 국가의 중요한 사안들을 보통 사람들의 평균적인 판단으로 결정하는 메커니즘에 대해 엘리트 지식인들의 회의적인 시선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인터넷 상에서는 직접민주주의를 향한 구호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http://www.gobada.co.kr/2mb_sig/sig.php 참조)
지금 우리에게 '국민 탄핵제'라는 권한만 있었어도 이 사태는 아주 쉽게 해결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달이 넘는 기간 동안 수만명이 거리에서 뛰어다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직접민주주의를 정면으로 제기해야 한다. 만약 앞으로 개헌이 있다면, 우리는 직접민주주의의 가장 기초 항목인 국민 소환제, 국민 탄핵제, 국민 발의제를 관철시켜야 한다.
우리의 지향점은 분명하다. 21세기, 세계 정치사의 새로운 혁명, 직접민주주의가 우리의 눈 앞에 와 있다. 직접민주주의는 2천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지고, 이제 이 땅에서 두번째 만들어지는 것이다. 기원 이후 처음 있는 역사적 사건이 바로 우리 앞에서 일어나고 있다. 2천년 전 그리스의 메타포를 채용한 다음의 아고라는 단지 어느 한 인터넷 업체의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2천년 전의 전무후무한 역사적 경험을 다시 불러오고 있다는 상징적인 공간이며, 개인들의 직접행동을 이끌어낸 직접민주주의의 예비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의 우리 모습을 자랑스러워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바로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직접민주주의가 십년 후에 세계의 정치체제를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네티즌, 직접민주주의의 돛을 올리다!
거리에서 '탄핵'이란 소리가 넘쳐흐른다. 다음 아고라에서 시발된 탄핵의 목
소리는 꺼질 줄 모른다. 이명박 본인이 만든 청계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은
현재의 민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 촛불은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
않다.
사기업인 인터넷 포털 다음에서 진행되는 법적인 구속력이 없는 포털 서비스
에서의 서명운동이지만, 이미 그 서명을 통해 표현된 의지만 120만명을 훌쩍
넘겼다. 갈길이 태산이다. 의료보험 민영화, 공기업 민영화, 대운하, 자사고
설립 등등... 무엇 하나 걸림돌이 아닌 것이 없다. 이명박 정부는 특유의 추
진력으로 100m 달리기를 하러 나왔는데, 알고 보니 장애물 경기장에 들어선
것이다. 과연 이 경기의 끝은 어떻게 될 것인가? 누구도 그 끝을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미 우리에게 '탄핵'이란 단어는 낯선 단어가 아니다. 2004년 우리는 이미
대통령 탄핵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
다. 무엇보다, 그때는 국민의 '대리인'인 국회의원들이 탄핵을 시도했었고,
대리인들의 탄핵 시도는 바로 '주권재민'의 주체인 국민들에 의해 저지되었
다. 그런데 지금은 '주권'을 가지고 있는 국민들이 탄핵을 주장하고 있다.
탄핵의 주체가 달라진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커다란 간극을 발견한다. 바로 '주권을 가진 국민들'과
'국민들의 정치적 대리인들' 사이의 간극 말이다. 이 간극은 이미 2004년의
탄핵에서 한번 확인된 바 있다. 그리고 2008년 우리는 이 간극, 바로 민심과
정치집단 사이의 괴리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원론에서는 '주권을 가진 국민들'과 '국민들의 정치적 대
리인들'이 서로 밀접하여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상정되어 있다. 적어도 원론
적으로는 마치 그 둘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서로를 끌어주는 것
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대의제 민주주의 이론이 어떻든, 현재 시점에 그 둘
사이는 서로 들떠 있다.
국민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된 바로 그 대통령을 배출한 한나라당이 민심
으로부터 이반되어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야당은?
민주당으로 대변되는 야당 역시 국민들의 민심으로부터 붕 떠있기는 마찬가
지다. 그들은 민심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민심 뒤에 숨어 눈치를 보고 있
다. 탄핵의 대상이 된 여당과 민심을 읽지 못하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야당
만이 존재하는 지금, 지금의 상황만을 놓고 본다면 아마도 사람들이 직접 나
선 것은 자신을 대변해줄 변변한 야당도 없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
이다. 즉 제대로된 야당이 있었다면 '민심'을 대변해 줄 수 있었으리라는 가
정, 그래서 대의제 민주주의가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했으리라는 가정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가 꼭 짚어보아야할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없을까?
'국민들의 대리인'이 모인 정치권에서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던 탄핵이
국민들의 입에서 자발적으로 나오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
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것은 첫번째, 지금 현재 한국에서 국민의
민의를 대변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두번째 더
중요한 것은 이제 국민들 스스로 탄핵을 제기할 수 있을 정도로 직접적인 참
여가 가능한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사실 첫번째 문제는 대의제가 거
의 언제나 잘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두번째, 불과 일주일만에 국민들의 직접적인 참여가 가능해지는 환경은, 우
리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다.
지금의 상황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자. 야당이 아주 소극적으로 쇠고기 협상
을 비판하고 있을 즈음, 최초의 촛불문화제였던 5월 2일 청계광장의 집회 소
식이 인터넷을 통해 퍼지기 시작한 건 정말 일주일도 채 안되는 일이었다.
그 일주일 사이에 사람들은 스스로 정보를 공유하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공감대를 만들고 급기야 수만명의 인파를 청계광장의 촛불로 연결시켰다. 그
런데 이렇게 사람들이 순식간에 참여하는 환경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사
실 촛불의 시발점이었던 '미선이 효순이' 추모 집회는 집회가 제안된지 불과
3-4일만에 조직되었다. 숭례문 화재 때 '국민 성금으로 숭례문을 재건하겠다
'는 발언은 인터넷에 쏟아지는 여론의 폭탄을 맞았고, 바로 그 다음날 철회
되었다. 불과 하루만에 말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이슈가 공론화되는 것은 하루면 충분하고, 큰 사안인 경우
에도 다수의 사람들이 정보를 습득하고 공유하고 토론하고 입장을 정리하고
행동에 나서기까지 이 모든 과정들이 일주일이면 가능한 시점에 다다른 것이
다. 즉 국민들의 집합적인 의사형성 및 표현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으며,
이는 곧 대의제 정치인들이 이를 수렴하여 정책에 반영하는 시간과의 차이가
점점 더 격차가 벌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바로 속도! 즉 국민들이 공론을 형성하고 의사를 표현하는 시간이
불과 일주일 안팎으로 당겨지는 지금의 커뮤니케이션 속도를 '직접민주주의
가 가능해지는 환경'이라고 본다. 기존의 정치권은 민심 위에 들떠있고, 국
민들은 직접적인 참여를 할 수 있는 환경! 이런 환경 속에서 대의제 민주주
의는 이제 더 이상 인터넷으로 형성되는 민심의 속도를 좇아갈 수 없다.
정치권이 국민들의 요구를 따라갈 수 없고, 국민들은 직접 참여할 수 있는데
굳이 대의제 민주주의에 머무를 필요가 있을까?
역사적으로 대의제 민주주의가 광범위한 동의를 얻은 것은, 근대국가 정도의
넓은 공간과 최소 수백만에서 수억에 이르는 인구수를 가진 공동체에서 개인
들끼리의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공동체 안의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 빠르게 의견을 수렴하고 의사결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즉 대의제 민주주의의 존재 의미는 대의제가 근대 국가 내부에서
커뮤니케이션 속도의 시공간적 제약을 보완할 수 있는 유력한 장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넷 시대에 국민들이 직접 사회적인 의제를 설정
하고 공론을 형성하고 직접 행동을 하는 상황에 이르러, 개인들이 인터넷으로
휴대폰으로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는 상황에 이르러, 우리에게 대의
제 민주주의가 적합한지에 대해서 우리는 심각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대의제로 민의를 반영하는 속도와 국민들이 스스로 공론을 형성하고
행동에 나서는 속도의 차이는 점점 격차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터넷이 도입되면서 직접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자주 거론되었던 이야기이다. 아니 이미 1960년대에
맥루한은 전기시대에 이르러 대의제 민주주의가 직접민주주의로 바뀔 것이라
고 예언한 바 있다.
정보의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정치는 대표를 선출하여 결정권을 위탁하는
경향에서 벗어났다. 전 사회 공동체가 의사 결정이라는 중추적 행위에 직접적
으로 관여하게 된 것이다. 정보의 속도가 느려지면 대리자나 대표자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대리자들을 내세움으로써, 사회의 다른 사람들이 처리되고
고려되기를 바라는 공공의 관심사에 대한 여러 분야의 견해들을 내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기의 속도가 이러한 대리, 대표 조직에 도립될 때, 이미
구식이 되어버린 이러한 조직은 속임수와 임시변통이라는 방법으로 간신히 그
기능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맥루한이 예언했던 바로 그 현상이 지금 21세기 한국에서 시작되고 있다.
나는 이미 다음 아고라에서 비공식적이고 비제도적이지만 실질적인 의미의
직접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고 판단한다. 네티즌들에 의해 직접민주주의의 '
돛'이 올려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실제 법적인 효력이 있는 서명이라면, 그
끝은 정말 '탄핵'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비공식적인 서명이며, 따
라서 그것이 전체 국민 2/3의 서명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법적인
구속력을 가지지는 않는다. 지금의 한계는 바로 이것이다 : 민심은 드러나지
만 그것을 반영할 수 있는 제도적인 통로가 존재하지 않는 것. 지금 우리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어디에도 이런 국민들의 직접적인 요구를 수렴할 사회적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제도화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이미 우리는 수차례의 경험
을 통해 국민들 스스로 의제를 설정하고 담론을 형성하고 행동을 조직하는
사례를 보아왔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직접민주주의를 제도화하여 개인들의
집합적인 의사가 실시간으로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직접민주주의가 우리들의 정치체제로 자리잡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의 역사적 원형인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체제
는 그것이 완성되기까지 3-4백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우리가 인터넷이란
훌륭한 툴을 가지고 있더라도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 제도 정도를 완성
하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단지 우리 사회에 직접민주주
의가 필요하고 지금 시점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공론화하는 데에만도 최
소 몇 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지 않을까? 또한 어떤 형태의 직접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적합한지를 모색하는데에도 상당히 오랜 시간과 실험과 시행착오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 작업을 큰 국가단위에서 시작할 필요는 없다. 가장 먼저
'직접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정당' 같은 곳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사안을 당원들
에게 직접물어 당의 진로를 결정하는 선도적인 실험을 할 수도 있다. 또한
시나 군 단위의 지방자치체에서 작은 규모로 직접민주주의를 시범적으로
시행해볼 수도 있다. 그렇게 작은 영역부터 직접민주주의를 도입하고 그
것을 제도화함으로써 우리는 사회 전반을 직접민주주의 형태로 바꾸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도가 아주 낯선 것만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직접민주주의와 유사한
형태의 참여행위들을 경험한 바가 있다. 2002년 유시민씨를 주축으로 만들어
진 개혁당은 인터넷에 기반한 당원들의 직접 투표로 정당의 주요 정책을 결
정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 실험은 당원들의 직접적인 의사결정
구조가 완벽하게 보장되지 않았다는 점과, 개혁당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해
체되고 말았다는 점 등에서 여러가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큰 의미를 지닌 실험이었다. 이것은 비록 정당수준에서 일회적으로
행해진 것이긴 하지만, 인터넷에 기반한 직접민주주의적인 의사결정체계가
정당으로서 정책을 제시하고 의견을 수렴하고 그것을 집행하는데 필요한 의
사결정 속도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국민들의 직접적인 의사를 수렴하는 새로운 기술적인 방안
도 경험했다. 2007년 통합민주당 대선 경선 때 한명숙 전 총리가 처음 제안
한 모바일 투표는 방법상 다소 어려워보이는 '실시간 여론 수렴'에 대해서
꽤 신뢰성 있는 대안을 실험한 역사상 최초의 사례이다. 그리고 그 이후 민
주노동당과 창조한국당도 모바일 투표를 시행한 바 있어, 향후 실시간으로
민심을 수렴하는 하나의 기술적 장치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해 주
었다.
이것만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정보 생산과 유통을 원활하게 해주고 보다 더
나은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게 해주고 개인들의 자기표현을 촉진하는
Web2.0 관련 기술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제공해줄
것이다. 더구나 24시간 항시 네트워크에 접속이 가능한 무선인터넷 환경은
더욱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만들어 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직접민주주의가 이미 우리 옆에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터넷 시대에 대의제 민주주의는 몸에 맞지 않
는 작은 옷이다. 그것은 우리의 활동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제 우리에게 필
요한 새로운 옷, 직접민주주의를 만들어가야할 시간이다.

http://undp.kr/dsn/sub_mobile_p02.php
대통합민주신당 모바일 경선에 등록했습니다.
당원도 아닌 내가 여기에 참여한 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번째는 까딱하다 잘못하면 대한민국 또 한번 IMF 맞겠구나 싶은 공포감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야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참여해야 최소한 나중에 나 자신을 덜 질책할 것 같습니다.
두번째로 모바일 기기를 투표에 활용한 것은 굉장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은 시범실시이지만, 앞으로는 이것이 정치행위에서 일상화될 것이고
그것은 곧 형식적인 측면에서 직접민주주의에 훨씬 더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만 한다면, 인터넷 문화에서처럼 정치문화에서도 한국이 세계적인 사례를 만들어낼지도 모릅니다.
위험성과 가능성이 각각 같은 무게로 짓누르는 2007년 대선이군요.
그 정보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것,
실시간으로 동시에 행동할 수 있다는 뜻.
어떤 정보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하거나 행위를 하는데 전혀 쓸모없어지는 정보들이 있다. 예를 들면, 3.1운동 소식이 한달 만에 산골짜기에 퍼졌을 때 그 산골짜기 사람들은 만세운동을 해야할까 말아야할까?
정보 유통에서 실시간이란 문제는 판단과 행동에 있어 시간지연을 없앰으로써 그만큼 신속한 의견취합이나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이것은 하나의 사안과 그 사안을 둘러싼 여러가지 정보에 대해 그 사안에 관심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번에,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함으로써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게 된다. (2002년 촛불시위의 경우)
-->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하게 되는 조건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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