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직접민주주의'를 언급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촛불문화제와 관련 12일 "이 새롭고 엄청난 경험이 평화적으로 행해져 성공을 거두면 21세기 세계의 민주주의에 큰 감동과 영감을 주고 새로운 진로를 제시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8주년 기념 특별강연과 만찬'에서 "2000년전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된 직접 민주주의 이래 처음으로 수천만 국민의 참여와 관심 속에 한국에서 다시 그 직접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직접민주주의는 인터넷과 문자메시지를 통한 온라인과 거리에 모인 촛불문화제의 오프라인의 연대 속에 행해지고 있다"며 "우리는 수많은 희생을 바치면서 피를 흘려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이제 한국에서 독재가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DJ "촛불문화제 성공하면 세계 민주주의에 큰 감동")
이 말은 처음이 아니다. 이미 지난 6월 4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촛불문화제는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된 중대한 변화고 말한 바 있다.
같은 말을 두번 반복했다는 건, 그 말에 대한 확신이 있다는 이야기이고
이 시대에 전달해야 할 메시지라는 판단이 있다는 뜻이다.
이 블로그에서 누차 이야기하지만
지금의 촛불문화제는 한국사회가 직접민주주의로 이행하기 시작한
바로 그 첫 출발점을 보여주고 있다.
네트워크로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개인들, 즉 네트워크화된 개인들이
한국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대규모로, 집단적으로 생겨나고 있으며
그들이 이제 사회의 핵심 권력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직접민주주의'라고 말한 것은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 한국사회의 정치적 지형이 어디에 있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정확히 꿰뚫어 이야기한 것이다.
최첨단 IT 문화가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한국에서
20세기의 대의제 정치모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정치모델이 탄생하고 있는 그 현장을
이 노회한 정치인이 꿰뚫어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치권에서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은 저 발언은 앞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지향점을 제시하는
나침판으로 1면에서 언급되었어야 할 내용임에도, 단지 지나가는 기사로 처리되고 있다.
적어도 기존의 지도층에서 지금의 상황을 꿰뚫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직접민주주의란 어짜피 몇몇 정치인이 아닌
바로 수천만명의 개인들이 만들어가는 것!
그것은 소수의 사회 지도층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이전 사회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그러니 과거의 '지도층'들이 이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분명한 것은 직접민주주의는 이미 비가역적인 형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과제는 직접민주주의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어떻게 가속화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간접민주주의'에 해당되는 글 2건
- 2008/06/13 블로초 촛불문화제는 고대 아테네 직접민주주의의 부활
- 2008/06/05 블로초 이제는 직접민주주의다!
이제는 직접민주주의다!
1. 거리의 정치는 이미 대의제를 넘어섰다. 예전의 관성으로 거리에서 '대중'들을 '지도'하려 했던 시민단체들, 운동단체들은 이 놀라운 상황에 어찌할바를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이 움직이는 방식도 일종의 대의제였기 때문이다. 대신 싸우고 사람들을 지도하고 이끌고, 경찰과 타협하고 사람들의 동선을 조율하는 것. 사람들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단체들, 운동단체들이 조율하는 것이 바로 대의제였고, 이것이 그 동안 우리 운동이 진행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거리의 정치는 이미 그것을 뛰어넘었다. 지도부가 없다. 누군가 마이크를 들고 '지도'하려고 하면 기어코 마이크를 꺼버린다. 그 누구도 이 공간에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동등함. 그 동등함으로 그 공간에 같이 존재하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질서가 없는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시위는 본 적이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하면 되고 무엇을 하면 안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경찰의 무수한 폭력에도 폭력으로 맞대응하는 것이 결코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철저하게 자신들의 행동을 조율하고 있다. 누군가 사고를 칠 것 같으면 바로 격리시켜 버린다.
거리행진의 방향도 결정된 것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향을 잃지도 않는다. 약간의 혼란이 있지만 곧 합의를 하고 움직인다. 결정은 바로 그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이미 거리에서는 직접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웬만한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는 이 거대한 변화를 은퇴한 노정객이 알아챘다.
""촛불집회, 직접민주주의 실현... 그리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2. 촛불문화제 전으로 돌아가 보자. 이 많은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광장에 모이게 되었을까? 그것은 순수하게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 광우병 쇠고기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울분, 그리고 광우병의 증거를 찾기 위해 정보를 확인하고 확인된 정보를 확산시키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렸던 수백만개의 손가락들... 그것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마침내 수만개의 촛불로 변화되었다. 그 시작에는 어떤 지도부도 없었다. 어떤 지령도 없었다. 지침도 전략도 없었다.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움직이며 정보를 모으고 공유하고, 잘못된 정보를 확인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고 최종적으로 거리에 선 것이다.
이 과정 속에는 어떤 대의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가 자기 스스로를 대표할 뿐! 나는 내가 본 것과 들은 것과 생각한 것과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속에서 나 스스로를 대표하기 위해서 광장에 선 것이지, 다른 어떤 누군가를 대표하기 위해서 혹은 다른 어떤 대표자를 뽑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다.
바로 그렇기에 사람들은 기존 시민단체들의 익숙한 행동들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 공간을 너무도 크게 장악해버리는 깃발을 내리게 만들고, 커다른 피켓을 작은 피켓으로 대체시키고, 획일적인 문구를 다양한 주장으로 그리고 급기야 관성적으로 공간을 장악하려는 시민단체들의 마이크를 꺼버렸다. 나를 대신할 누군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위대를 이끄는 건 경험많은 시민단체 회원, 운동단체 회원이 아니다. 바로 시민들 그 자신들이다.
직접민주주의!
이것이 바로 거리에서 작동하고 있는 직접민주주의이다.
3. 단지 거리뿐일까? 간접민주주의의 이론적 근거는 국가 단위의 영토와 국민수 정도가 되는 공간에서
1) (인터넷 이전의 사회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동등한 정보를 비슷한 순간에 공유할 수 없다는 것
2) 비슷한 정보를 공유하더라도 그 정보를 기반으로 한 다수의 판단이 빠르게 집적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다수의 의견을 모두 취합하기에는 의사결정이 너무 늦어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다수의 의견을 모두 취합하는 (직접민주주의적인) 방식을 채택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국민 주권>이라는 민주주의의 원래 이념에 비추어 간접민주주의는 사실상 주권을 위임하는 것이기에 민주주의의 원래 의미에서 벗어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간접민주주의가 작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리고 역사상 있었던 그 무수한 직접민주주의 실험들이 실패했던 것은 이런 현실적인 장벽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런 현상은 모두 역전되어 버렸다. 인터넷을 통한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은 근대국가라는 커다란 공간적인 거리를 더 이상 의미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공간을 뛰어넘는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로써 '다수의 사람들이 동등한 정보를 비슷한 순간에 공유할 수 없었던' 간접민주주의 첫번째 조건이 해체된다.
수십만, 수백만명의 의견이, 현실에서 필요한 실행의 속도를 방해하지 않고 수렴될 수 있을까? 당연하다. 이미 지난번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 모바일 투표로 이에 대한 실험이 진행된 바 있다. 투표? 그것은 단지 형식적인 행위일 뿐이다. 사실 인터넷 게시판에 쏟아지는 댓글은 빠르면 하루 만에 민심을 파악하게 만든다. 이런 빠른 커뮤니케이션 덕분에 숭례문 화재 사건 때 이명박의 '성금 재건' 발언은 하루만에 취소되고 말았다.
사실은, 이미 우리 사회 내부 구성원들의 의사소통 속도는 직접민주주의 단계에 와 있다. 늦어지는 것은 오히려 정치권이다. 사회 내부에서 형성되는 의사소통과 판단의 집적이 간접민주주의에 기반한 지금의 정치권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정치권이 사회 전체 의사소통의 속도를 막고 있는 형국이다. 즉 우리는 인터넷에 기반한 직접민주주의적인 미디어 환경에서 간접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직접민주주의는 우리가 만들어야 할 지향점이나 이상향이 아니라, 환경, 인터넷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커뮤니케이션 환경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 전체의 자원 분배 역할을 하는 정치적 의사결정이 민의가 형성되는 속도에 맞추기 위해서는 직접민주주의를 도입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안된다면, 우리는 계속 의사결정이 지체되는 현상을 겪게 될 것이고 이것은 곧 사회 전체의 지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쇠고기를 통해 겪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사회 전체 의사결정의 지체!
이미 민의가 무엇인지는 분명해졌는데도 그것을 반영할 방법이 없으니 한달째 이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터넷 시대의 커뮤니케이션 환경에 맞도록 정치제도를 바꾸는 것은 대단히 시급한 과제이다. 즉 우리는 이제 직접민주주의를 이 땅에 구현해야하는 환경을 맞고 있다.
4. 무엇을 할 것인가?
직접민주주의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직접민주주의에 회의적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고, 직접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 기득권 층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이며, 국가의 중요한 사안들을 보통 사람들의 평균적인 판단으로 결정하는 메커니즘에 대해 엘리트 지식인들의 회의적인 시선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인터넷 상에서는 직접민주주의를 향한 구호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http://www.gobada.co.kr/2mb_sig/sig.php 참조)
지금 우리에게 '국민 탄핵제'라는 권한만 있었어도 이 사태는 아주 쉽게 해결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달이 넘는 기간 동안 수만명이 거리에서 뛰어다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직접민주주의를 정면으로 제기해야 한다. 만약 앞으로 개헌이 있다면, 우리는 직접민주주의의 가장 기초 항목인 국민 소환제, 국민 탄핵제, 국민 발의제를 관철시켜야 한다.
우리의 지향점은 분명하다. 21세기, 세계 정치사의 새로운 혁명, 직접민주주의가 우리의 눈 앞에 와 있다. 직접민주주의는 2천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지고, 이제 이 땅에서 두번째 만들어지는 것이다. 기원 이후 처음 있는 역사적 사건이 바로 우리 앞에서 일어나고 있다. 2천년 전 그리스의 메타포를 채용한 다음의 아고라는 단지 어느 한 인터넷 업체의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2천년 전의 전무후무한 역사적 경험을 다시 불러오고 있다는 상징적인 공간이며, 개인들의 직접행동을 이끌어낸 직접민주주의의 예비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의 우리 모습을 자랑스러워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바로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직접민주주의가 십년 후에 세계의 정치체제를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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