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치학의 고전 맞다. 57년에 출간된 책이 97년에 번역되었다는 건, 그만큼 우리나라 정치학이 후진적이라는 걸 증명하는 거 같다.
2) 개개인의 정치적 의사결정, 정당의 정치적 의사결정에 대해서 경제학적 개념을 동원해 설명한다. 즉 정치에 대한 경제학적 해설이다. 일종의 정치경제학.
3) 정치가 얼마나 예측적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정치 공학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다. 물론 그건 어느 정당이 당선되고 안되고 이런 수준의 문제는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문제를 포함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 기저에 있는 정치의 논리들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를 준다.
4) 정보 문제가 정치구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완전 정보 상태에서 가능한 정치형태와 정보가 불완전하다고 가정했을 때, 즉 현실에서처럼 정보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가 불균등할 때 가능한 정치형태를 구분해서 보여줌으로써, 정보가 사회전반적인 의사결정과정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책 전체가 정보 문제에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결정과정에 대한 논의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과정 중에 정보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정보에 대해서 이런 정도로 다룬 책은 정말 찾기 어렵다.
5) 역으로, 이 책은 정보가 조금 더 풍부해졌을 때 즉 인터넷으로 정보유통구조가 바뀌었을 때 사회 전반적인 의사결정과정이 어떻게 변할지를 추론해보는데 단서를 준다.
위키노믹스 포럼에 갔다왔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는데 거기서 평소에 즐겨보던 블로거분도 만나고 유익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약 2장까지 읽었는데, 구글이니 웹2.O이니 하는 논의들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는 큰 임팩트가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현재의 큰 흐름의 경제적 측면을 추출하여 정리했다는 면에서 상당한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트렌드와 방향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책 전반의 느낌이 조금 선동적인 면이 있어서
'정말 그래?' '그게 그 정도까지 얘기할 수 있는 지점까지 온거야?'' '그래도 실생활을 지배하는 건 옛날 것들 아닌가?'
이런 의문이 살짝 들기도 합니다. 리눅스 경제학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하지만 그렇다고 MS의 지위가 아직은 흔들리지 않는 현재의 상황과 비슷하게 말입니다.
그리고 어제 포럼에서도 지적되었던 부분인데, 번역어가 조금 문제가 있네요.
예를 들면 '자체 조직화'라는 단어는 '자기조직화'(self organization)라는 다소 공식화된 번역어가 있습니다. 카오스적으로 무질서하게 보이는 곳에서 자발적으로/자생적으로 생겨나는 질서 혹은 조직화되는 현상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자기조직화라는 것은 1970년대에 이탈리아의 네그리가 적극적으로 사용한 개념인데, 이것은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일리야 프리고진이 먼저 자연과학에서 발견한 현상을 토대로 사용한 개념입니다. (프리고진의 책 중에 유명한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라는 책이 있는데 지금은 아쉽게도 절판되었네요.) 그리고 이 개념은 90년대 이후 카오스 이론의 대체이론으로 부각되고 있는 복잡성 과학(Complexity Science)의 근간이 되는 개념입니다. (복잡계 관련글 참조)
이런 몇가지 부분을 제외하고, 글은 술술 잘 넘어가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작금의 이야기들과 트렌드를 정리하기에는 참 좋은 책입니다.
오 그게 그렇게 해석이 되는군요. 공식화된 번역어니 그것을 따르는 것이 맞겠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점점 많은 것들을 새롭게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좋은 정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참석하셨던 분 중에 옆자리에 앉아계셨던 분이 자연과학 쪽에서 얘기를 하시면서 위키노믹스가 비슷한 거 같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거기서 처음 나온 얘기였군요. 어쩐지... ^^
위키노믹스 말미 부분인가에 그렇게 되어 있을 겁니다. 기득권이 꼭 기득권을 포기할 필요없이 협업을 활용하는 부분적인 수용에 대해서... 아마도 MS가 처음에는 리눅스에 대해서 얕보았다가 나중에는 어느 정도 제한적으로 공개하는 정책을 쓴 것도 그러한 부분에 대한 의식이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그러한 부분에서의 접근은 제가 매우 논하고 싶어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MS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MS도 지켜보면서 그것을 부분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적절한 범위 내에서 기득권을 굳이 다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 관점이라고 해석이 되구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만 변하지 않는다.' 어디서 본 얘기 같은데 변화하니까 지금의 지위를 놓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또한 앞으로는 또 어떻게 적응하고 변화해갈 지에 따라 지위가 지금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앞으로도 종종 모임에서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
저도 배웠습니다. <집단지성>을 다 보고 난 다음에 드는 생각이 블로초님께서 얘기하셨던 집단과 집합이라는 것에 대해서 저 또한 집합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용어 그 자체보다는 활용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블로초님의 그런 의견을 너무 쉬이 흘려보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Small World나 링크를 봤던 사람이라면 복잡계(Complexity) 혹은 복잡과학(Complexity Science)란 말을 들어봤을 겁니다. 복잡계 이론이란 사회현상이나 자연현상, 물리현상을 설명하는 최근에 탄생한 새로운 이론 틀거리입니다. 물리학, 생물학, 사회학, 수학, 카오스 이론, 경제학, 컴퓨터 사이언스, 신경과학, 인공지능, 네트워크 과학 등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이 이론을 활용한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고 관련된 책들이 꽤 나와 있긴 한데, 학문 사이를 넘나드는 이야기들이 많아 관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읽혀지지 않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위 책은 추천할만한 책입니다. 국내에서 다양한 학문배경을 가지고 복잡계에 관심있는 교수 등 연관자들이 만든 '복잡계 네트워크'라는 곳에서 워크샵을 개최하고 그것을 출간한 책인데, 각 학문이 왜 '복잡계'라는 문제틀에 관심을 갖는지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등을 알 수 있는 책입니다. 복잡계, 네트워크, 사회현상 등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추천할만 합니다.
더불어 올 12월 1일에는 '복잡계 네트워크'에서 주최하는 제1회 복잡계 컨퍼런스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위 책을 만들어내게된 워크샵은 작년에 소규모로 진행된 것 같고, 올해는 규모가 조금 커지고 할 얘기도 많아진 모양인지 컨퍼런스로 열리네요.
예측할 수 없고 알 수 없다는 카오스 이론 혹은 열역학 제 2법칙(엔트로피 법칙)이 생명에 대한 대단히 희박한 가능성을 주었다면 (지은이의 말대로...) 최근 나오는 복잡계 이론은 생명과 에너지에 대한 풍부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복잡계에서 질서-이게 더 고도화되면 생명이 된다-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며, 그것이 복잡계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복잡계 안의 메카니즘을 분석하려는 네트워크이론, 요즘 얘기되는 창발성(emergency) 등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자연계에서 생명은 풍부한 것이다. 임계점 이상의 구성요소들이 섞여있을 때 질서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며 한번 형성된 어떤 질서의 패턴들은 또 다른 질서의 패턴들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들이 또 상호작용하여 더 많은 질서의 패턴들을 만들어낸다는 거다. 예를 들자면 지구상의 생명계는 서서히 진화한게 아니라 한꺼번에 폭발한 후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에 따라 정리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본다. (베르그송도 생명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생명은 적자생존에 의한 자연선택이 아니라 창조적 진화라는 관점.)
카우프만은 진화의 두 요소로 선택과 상호협조에 의한 자기조직화를 이야기한다. 즉 생명은... 아니 자연은 그 안에 자기조직화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자기조직화한 것들 중 자연선택에 의해 환경에 최적화된 것들이 살아남은 것이라고 한다. 통속적인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반론인 셈이다. 이것은 또한 다윈의 진화론에 근거해서 강자의 논리, 적자생존만을 강조하는 파시즘적 사고에 반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은 노자의 사상과 너무나 잘 맞아떨어진다. 사실 요즘 나오는 서양과학과 철학의 새로운 주장들은 대부분 노자나 주역의 이야기들을 학문적으로 풀어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럴 땐 동양적 문화환경에서 태어난 것이 은근히 자랑스럽기도 하다. 머... 학교에서 그걸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나온지는 좀 된 제레미 리프킨의 [수소혁명]란 책을 최근에 읽었습니다. 수소에 대한 이야기는 꽤 오래 전에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에서는 앞으로 수소가 에너지의 주원이 될 것이고, 그래서 군대에서 쓸데 없는 일 시키지 말고 차라리 수소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연구시키자... 이런 제안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수소를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가 쓰레기더미나 분료에서 나오는 메탄가스를 분해하는 것이기에 그런 생활 속의 연료들을 재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하자는 것이죠. 연구에 따라서 에너지원이 무궁무진해진다는 겁니다. 그때는 조금 먼 얘기 아닌가 싶었죠...
[수소혁명]로 돌아오면, 이 책에서 제시하는 내용들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근대문명을 뒷바참하고 있는 석유경제는 수명이 불과 십여년 남아있다는 거지요. 그리고 그 사이에 에너지 전환을 하지 않으면 인류는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된다는 겁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라서 그 얘기 자체에는 별로 감흥이 없는데, 대안으로 제시하는 수소경제가 흥미롭습니다.
수소경제에서 재미있는 것은, 석유는 석유가 나오는 곳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앙집중적인 산업구조가 되지만, 수소는 모든 곳에서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분산경제가 된다는 겁니다. 최근 보급되기 시작한 연료전지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지요. 심지어는 마치 인터넷처럼 각 노드들이 수소를 생산하고 그것을 필요한 곳에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지금의 가스관과 같은 수송관들이 인터넷처럼 수소를 쌍방향으로 필요한 곳에 보낼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에너지 생산 댓가를 받으면서요.
현재의 전력도 이런 구조가 가능합니다. 외국에서는 태양열, 풍력 등을 활용해 전기를 생산한 개인들이 그것을 다시 전력회사에 되파는 시스템이 구축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대체에너지를 연구하는 한 할아버지가 국내 최초로 전기를 한전에 되팔아 적지 않은 수입을 버는 걸 TV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수소경제에서는 이런 분산경제가 일반적인 것이 될 거라고 합니다. 태양열, 지열, 풍력 등으로 생산한 전기에너지 혹은 분료나 쓰레기에서 발생된는 메탄가스로 수소를 만들어 연로전지를 충전하고 그래도 쓰고 남는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운송하는 시스템 말입니다. 에너지 경제의 민주화모델일텐데, 이렇게 된다면 중앙집중적인 산업구조 전반에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제관계에서도 에너지 때문에 강대국에 굽실거려야하는 상황은 많이 나아지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그것은 우리가 성공적으로 수소경제로 전환했을 때에나 꿈꿔볼 수 있는 유토피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지구 온난화를 고발하는 앨고어의 [불편한 진실]이 경고에서 멈출지는 저도 의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으로써 살아가는 세상을 내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바로 그것을 해야합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토 마투라나] p.338)
구성주의(Constructivism)은 한국에서 크게 소개되지 않은 학문 영역입니다. 교육학쪽에서는 구성론이 상당히 많이 활용되는데 반해, 기타의 학문 영역에서는 아주 생소한 학문으로 남아있죠. 구성론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사회적 구성론(Social Constructivism)과 급진적 구성론(Radical Constructivism)이 그것인데, 제가 아는 것이 적어서 구체적으로는 설명을 못드리겠습니다. 다만 급진적 구성론은 어떤 사람들은 "근본적(Radical)" 구성론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Radical Constructivism에서는 진리와 인식은 철저하게 인간들의 행위에 의해 재구성된다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서양 근대철학의 질문은 '진리란 무엇인가?'(존재론) '나는 진리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인식론)의 큰 두 축에서 전개됩니다.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데카르트는 의심하고 의심한 끝에 '의심하는 자신'은 의심할 수 없다는 출발점을 만들지요. 사실 지금에 와서는 매트릭스 같은 영화 하나만으로도 혹은 신경생리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약물 하나로도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자아'를 가볍게 비판할 수 있지만,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 의심할 수 없는 근거를 만드는 작업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지요. Radical Constructivism에서는 그런 질문 자체를 우습게 생각합니다. 문제제기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지요.
복잡하고 자신없는 이야기라 이쯤에서 멈추는게 좋겠네요. 어쨌든 이 책은 현대 교육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장 삐아제나 인류학자이자 사이버네틱스 학자인 그레고리 베이트슨, 생물학자인 프란시스코 바렐라, 인공지능의 대부인 마빈 민스키 등과 함께 Radical Constructivism의 대가라고 불리는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최근 저작입니다. 위 사람들의 저작은 거의 번역이 되지 않았거나 혹은 번역이 되었어도 대부분 절판된 상태라서 더더욱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공부를 하려고 자료를 뒤져봤는데 많이 없더라구요.
그런데 다행히 굉장히 쉽게 쓰여진 책이 나왔네요. "있음에서 함으로" (From being to Doing)라는 제목 자체가 상당히 도발적입니다. 플라톤 시대 이래 서양철학에서 끊임없이 물고늘어졌던 존재(Being)라는 문제틀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니까요. 대담 형식으로 쓰여져 있어 읽기 쉽고, 마투라나의 문제의식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간만에 좋은 책을 읽었네요. 이쪽 분야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아래는 제가 인상 깊었던 구절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저에게는 굉장히 인상적인 표현들입니다.
언어는 감옥이 아닙니다. 언어는 하나의 존재 형식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자 방법입니다. '언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라는 단순한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다른 공간이, 즉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공간이-설령 그곳에 결코 다다를 수 없다 할지라도-존재한다고 믿도록 만듭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토 마투라나] p.45) ~~~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고 사건과 그것의 결과들에 대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메타 수준' 위에서 작동을 수행합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토 마투라나] p.124)
진실을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실재에 준거하는 것입니다. 권력, 지배 그리고 통제에 기초를 둔 문화에서, 그것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사물에 대한 그 자신의 견해에 복종하도록 강제하는 것에 정당성을 보여해줍니다. 그렇지만 실재에 다가갈 수 있는 단일한 특권적 접근권이 없으며, 지각과 환각이 체험의 현실적 과정에서는 구분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인간이 '일이 이러이러하다'라고 주장하기 위해 어떤 기준을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발생합니다. ... 이러한 타당성은 권위와 무조건적 정당성을 '주장되는 것'에 넘겨줄 것이고, 그리하여 복종을 목표로 할 것입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토 마투라나] p.61-65)
관찰자들이 행위의 적절함을 규명하는 방식으로 유기체들과 환경들의 상호작용을 해석합니다. 그리고 바로 관찰자들이 관찰된 체계들의 행동의 적절성과 적합성을 근거로 하여, 그 체계들이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행동들이 인지적 작용을 함축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생명의 유지는 지식의 표현입니다. 존재영역에서의 적절한 행위의 표명입니다. 아포리즘의 형태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들의 삶 속에서, 삶은 앎을 수반하고 앎은 삶을 수반한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토 마투라나] p.106-107)
행위의 조정에 대한 조정.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토 마투라나] p.144) '행위들의 조정의 조정에는 하나의 순환[재귀]가 있다. 이것은 그 이전의 적용의 결과들에 적용되는 주기적인 작동이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토 마투라나] p.145)
우리가 행위의 순환[재귀]적인 조정, 즉 행위의 조정의 조정에서의 흐름과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적 즉 언어가 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이것은 언어가 정보 전송의 수단이 아니라 그리고 소통 체계가 아니라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자 방법임을 드러내 줍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토 마투라나] p.146)
'내가 볼 때 지능은 어떤 특정한 활동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유연하게 그리고 내적 조형성을 가고서 움직일 수 있는 보편적인 역량이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토 마투라나] p.222)
그 당시 MIT에서는 정보 개념이 중심적이었지 순환성이라는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와렌 맥쿨로치가 유기체가 자신의 매개체로부터 어떤 피드백을 수용한다고 진술할 때, 나는 이것을 순환성에 대한 완전한 표명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만일 유기체와 매개체를 이런 식으로 서술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각각 분리시킨 것입니다. 유기체가 무언가를 발생하도록 야기하고 그래서 그것의 매개체로부터의 어떤 피드백을 수용한다는 생각을 따르는 이러한 종류의 생각은 선형적인 관계의 두 양극 사이를 앞뒤로 움직이는 것과 유사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거짓 순환성입니다. .. 내가 순환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하나의 완전한 순환적 존재인 매개체와 상호작용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유기체의 순환적 동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토 마투라나] p.241~243)
이러한 관찰하는 아웃사이더의 역할을 연기하는 사람들은 가장 공평한 종류의 삼중보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체계의 내부를 보고 그것의 구성요소들과 그것들의 상호관계들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체계가 상호관계들의 영역 속에서 하나의 전체로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영역이 이번에는 '메타 영역' 안에서 내적인 관계들의 영역과 관련되는지 알아야 합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토 마투라나] p.253)
권력은 복종이 있을 때에만 출현합니다. .. 우리는 어떤 것-생명, 자유, 재산, 직업, 관계 등등-을 지키거나 구하기 위해 타자들에게 권력을 부여합니다. '권력은 복종을 통해 탄생한다'라는 게 내 주장입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토 마투라나] p.279)
존재의 근본적인 조건은 신뢰입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토 마투라나] p.321)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으로써 살아가는 세상을 내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바로 그것을 해야합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토 마투라나] p.338)
20년동안 연구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스케일도 크고 참고자료가 무려 50페이지이니... OTL.
내용인 즉
1) 박테리아부터 인간까지 생물체의 기본구조는 네트워크이다. 이 네트워크는 박테리아들의 네트워크부터 꿀벌들의 네트워크, 생물들의 신경네트워크에서 인간들의 도시 네트워크까지... 나아가 집합지능이 가장 생생하게 보이는 인터넷까지.. 기본구조는 네트워크라는 것. (동의)
cf) 꿀벌들에게 매일 먹이가 있는 거리를 두배씩 늘렸더니 어느 순간부터 그 다음날 꿀벌들이 두배 거리에 미리 와있었단다. 꿀벌들의 집단지능이 수학적 계산을 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
2) 진화의 동인은 유전자가 아니라 네트워크라는 것. (동의)
네트워크는 마법과 같다. '뉴런이나 독립적인 생물들이 집단에 참여하면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정보처리자가 탄생한다'
그러나...!!
버뜨!
1) 네트워크를 강조하다보니 개체가 소멸된다. 개체가 소멸되는 순간 하워드 블룸의 이론은 집단주의가 된다. [대중의 지혜]나 [이머전스]나 [Sync]도 [혼돈의 가장자리]도 역시 네트워크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거기서는 개체가 소멸된다는 느낌이 없다. 그런데 블룸의 논의에서는 개체가 모두 집단의 생존을 위해 존재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나가면 파시즘이다.
2) 그는 집단적 학습 장치로 1) 동조집행자, 2) 다양성 생성자, 3) 내부 심판관, 4) 자원 이동자, 5) 집단간 토너먼트, 이 다섯가지를 든다. 그리고 그는 이 다섯가지 항목으로 모든 네트워크의 진화를 설명한다. 그런데... 문제가 심각하다.
예를 들면, [내부심판관]이란 것을 강조하게 되면 모든 경쟁에서 이긴 승자들은 정당성을 얻게 된다. 그 개체들에게 영향을 끼친 환경적 요인들과 우연적 요인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승리한 결과로 '우월성'을 부여한다면 결국 최후의 승자가 옳다는 이야기가 된다. 윤리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대목이지만, 그것보다 먼저 이런 식의 논의는 모든 문제에 대해 다 설명할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런 설명도 못하게 된다.
실제로 그는 이 책에서 모든 것을 다 설명한다. 좀 웃긴다.
3) 이런 논의의 결과로 그가 펼치는 정치적 주장은 이슬람에 대한 심각한 혐오다. 혐오의 근거는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의 논의대로라면 이슬람이 살아남은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은가? 또한 이슬람권이 미국을 공격해서 이기면 그것이 우월하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그가 책 말미에 왜 그렇게 이슬람을 비난하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거다. 그의 이전 책, [루시퍼의 원리]도 정치 얘기로 가면 황당해진단다.
모든 이론은 양면성을 갖는다. 예를 들면 구소련에서 보듯 맑스의 혁명철학과 사회사상도 파시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그리고 하워드블룸에게서 네트워크 이론이 어떻게 전체주의를 지지하는 이론으로 쓰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 하다. 네트워크 이론에서 개체의 가치가 사라질 때, 그것은 파시즘을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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